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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세계적으로 미니멀 트렌드를 만들다 <IKEA 이케아>

by 세모킴 2023.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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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미니멀하고 편안한 색감 등 북유럽 감성과 디자인이 주류로 떠오른 지는 꽤 되었죠.

패션에서는 물론이고 제품디자인 영역까지 뻗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단연코 인테리어 양식, 더 나아가 가구 디자인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미니멀 감성을 부자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깊숙이 파고든 브랜드 이케아의 스토리를 알아보겠습니다.

 

 

이케아 로고

 

IKEA 브랜드의 탄생

이케아는 대표적인 스웨덴 브랜드 입니다.

이 브랜드는 잉바르 캄프라드라는 청년에 의해 시작되었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용돈을 받으면 성냥을 여러 갑 사서 판매하여 이윤을 남기고, 또 용돈을 받아서 생선, 카드, 펜 등등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판매하며 사업가의 면모를 보여주며 성장을 합니다.

그렇게 1943년 17살의 나이로 용돈과 벌어들인 돈으로 창고에서 IKEA라는 이름으로 자기만의 사업을 시작합니다. 

 

 

잉바르 캄프라드

이케아 이름의 뜻

이케아의 뜻은 약자로 본인의 이름인 Ingvar Kamprad (잉바르 캄프라드)의 앞글자인 I와 K를, 본인이 자라온 농장의 이름인 Elmtayd(엘름타뤼드)의 E, 자신의 마을인 Agunnaryd(아군나뤼드) 의 A.

이렇게 앞글자들을 따서 IKEA라는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스웨덴 어로 읽어도 우리와 같은 이케아라는 발음이지만 영어권에서 읽히기에는 아이키아로 읽히기에 다양한 서구권 문화에서는 아이키아로 읽히는 일이 더 많다고 합니다. 

 

브랜드의 성장

초기 이케아의 카탈로그

당시 잉바르 캄프라드는 그 IKEA라는 창고에서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건 죄다 모아서 쌓아놓고 판매를 했습니다.

하지만, 동네가 작고 판매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한정되어 있기에 이 마을을 벗어나서 판매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통신판매를 시작하게 되는데 처음으로 우편 카탈로그를 제작해 여러 마을에 뿌리게 됩니다.

또한 배송 문제의 경우에 우유배송을 하는 차량의 빈 공간에 자신의 물건을 실어 날라주면 지불하겠다는 계약을 제안하고 판매를 시작하게 됩니다.(이때까지만 해도 마구잡이식의 다양한 물건들을 판매하는 만물상에 가까웠습니다.)

 

 

본격적인 IKEA 가구 판매의 시작

1948년 본격적으로 가구 판매를 시작하는데, 2차 대전 이후 비싼 가구가격 때문에 젊은 신혼들이 가구를 사지 못하는데 안타까움과 그 시장의 빈틈을 보고 판매를 시작합니다. 

비싼 가구가 아닌 가격이 저렴하면서 품질이 좋은 가구를 제공하였는데 이게 인기 몰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델들도 늘어나게 되는데, 창립자인 잉바르 캄프라드는 난독증이 있었기에 수많은 모델명을 스웨덴의 지역이름이나 사람이름으로 대체해서 사용하게 되었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951년 카탈로그

 

1951년에는 가구만을 판매하기로 결심하고 1953년 자신의 마을에 최초로 첫 가구 전시장을 오픈합니다.

기존의 판매방식과 동일하게 저렴한 가격대에 멋진 디자인과 실용성을 제공하기로 마음먹으며, 쇼룸의 형태로 전시장을 오픈하고 가구들을 전시했고, 찾아온 손님들에게는 빵과 커피를 제공하는 등 규모만 다를 뿐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이케아 매장이 시작됩니다.

 

 

 

 

경쟁 브랜드의 압박과 그로 인한 성장

이렇게 이케아가 승승장구하자 다른 대형 가구 브랜드들은 가격에서도 혼란을 빚게 되고 점유율도 빼앗기게 되는데 불만을 느끼며, 이케아에게 가구를 보내지 말라고 다른 업체들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스웨덴의 대부분의 가구브랜드들이 이케아를 보이콧하였고, 이케아는 이 상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또 돌파구를 찾습니다.

그 돌파구로 본인들이 직접 디자인에 뛰어드는 자체제작을 시도하게 되면서 이케아의 대표 디자이너인 '일리스 룬드그렌'을 모셔오게 됩니다.

 

일리스 룬드그렌

 

일리스 룬드그렌의 업적

일리스 룬드그렌은 지금의 이케아를 존재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디자이너였습니다.

대표적으로 10초에 1개꼴로 판매된다는 수많은 판매고를 올린 책장 '빌리'를 10초 만에 냅킨 위에 디자인하여 제작하였으며, 어느 날 자동차 트렁크에 가구를 넣기 불편해서 다리를 분리하고 넣게 되었고, 이 점을 착안하여 1953년 최초로 분리, 조립형 디자인인 Flat-Pack(납작한 상자에 부품을 넣어서 파는 자가 조립용 가구) 방식을 개발하게 됩니다.

이는 지금의 이케의 고품질 저가격을 만든 방식으로 보관, 운송에 용이하고 손상은 적으며 조립비용 절감 효과까지 있는 황금알이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케아의 로고 디자인도 하는 등 지금의 수많은 업적을 남긴 디자이너였습니다.(2016년 별세)

 

빌리 책장

 

스웨덴 시장 점령, 해외시장 확대

계속된 보이콧에 이어 생산업체들까지 보이콧을 하고 나서니 이케아는 해외생산 라인을 찾고 확대하기 시작합니다. 이와 함께 플랫 팩 방식으로 가격경쟁률은 더욱 경쟁력을 가져가고 당연하게도 점유율은 계속해서 상승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본이 확대됨에 따라 더욱 가격 낮추기에 몰두하는데 일반적인 회사와 다르게 원가 절감이 아닌 기존의 이케아가 하던 방식대로 다른 생각을 하며 관념을 타파하여 원가절감을 해 나갑니다.(쓰고 남은 목재를 압축해서 새로운 목재를 만들고, 쓰고 남은 원단을 사용해 쿠션을 만드는 등)

하지만 이렇게 구두쇠 같은 전략뿐 아니라 대안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본인들이 직접 철도나 도로를 만드는 등 대규모 투자를 하기도 합니다.

 

이케아 매장

 

공격적으로 가격경쟁력을 갖춘 이케아는 해외시장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 역시 대규모 열풍을 불어옵니다.

미국, 중국, 일본 할 것 없이 성공했으며, 2014년에는 한국에도 들어와 큰 인기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들은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을 중심으로 현지에 맞게 전략을 수정해나가는 방식으로 접근하여 해외에서도 계속된 성공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도 디지털 쇼룸을 제작해 제공하는 등 계속해서 소비자들과 친근하게 접촉했으며 앞으로의 변화무쌍한 모습도 기대가 됩니다.

 

왜 이케아는 성공할 수 있었는가?

 

 

첫 번째로 가격경쟁에 있습니다.

앞선 설명처럼 그들은 남들과 다르게 빈틈을 찾아가며 효율적으로 움직였으며, 이제는 그게 필수적인 트렌드로 자리 잡으며 재활용이나 지속가능성을 마케팅에서도 재미있게 연출하며 앞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들이 말하는 지속가능성과는 조금 다르게 전 세계 나무의 1%를 매년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세계에서 3번째로 목재를 많이 사용하는 브랜드라고 하네요...

 

두 번째로는 고객경험에 있습니다.

이케아는 직접 제작하는 DIY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소비자로 하여금 브랜드와의 접촉, 참여를 이끌어 내고 나아가 완제품 이상의 가치를 제공하는 가치중심적 브랜드인 셈입니다. 또한 이로 인해 제작하기 어려울 수 있는 가구를 제작함에 오는 자신감 상승까지 모두 플러스적인 요소로 뭉쳐있는 셈이죠.

 

세 번째로 푸드코트입니다.

예상외로 푸드코트가 매출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1년 매출이 2300억 원 이상 나온다고 하니 웬만한 F&B브랜드 급 매출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여기서도 이케아는 본인들의 철학을 고수하는데 이케아 푸드코트를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음식들이 꽤나 있으며, 규모가 큰 매장의 특성상 구경하다가 배고플 중간 즈음 나타나주어 쉼과 커피 한잔을 제공해주는 푸드코트는 너무나도 반갑죠.

 

네 번째로 북유럽 디자인과의 적합성.

의외로 요즘 우리나라의 소규모 가정에 적합한 형태의 디자인 양식입니다.

북유럽 디자인의 특성이 빛을 집안에 퍼지게 하여 공간적으로 넓어 보이게 하며 깔끔한 배치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디자인인데, 이게 우리나라의 현대적 흐름상 1인가구가 늘며 비교적 좁은 집에서 넓은 공간의 효과를 누릴 수 있음에 가성비까지 좋으니 성공할 수 있었으며, 이는 다른 나라의 흐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케아 성장의 비화

 

 

이렇게 친 소비자적인 기업인 이케아 그들에게도 뒷면은 있었는데, 이케아는 당시 스웨덴 정부가 추진한 대규모 주택 건축 계획 덕에 급성장을 하게 되는데 비후 비용 절감을 위해 임금이 낮은 동유럽으로 생산공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의 먹구름이 함께 이동하게 되었는데요, 1960 ~ 1980년대 동독 비밀경찰과 협력해 정치범들이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이케아 가구를 만드는 데 동원되기도 했으며,

17살 때는 유대인 혐오와 인종차별로 악명 높은 스웨덴 파시스트 페르 엥달이 이끄는 나치 정당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에 와서 나치 지지는 내 생의 가장 큰 실수라며 공개적으로 해명을 하기도 했으나, 2010년 인터뷰에서는 "페르 엥달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 생각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합니다.

 

 

 

그럼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 깊숙한 곳에 다가오며 북유럽의 디자인 감성을 우리 집 안으로 들여온 이케아, 지도자도 바뀌었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성장을 해 나가며 깨끗하고 높은 가치를 만들어 낼지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디자이너든 비싼 책상을 디자인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1/5 가격에 기능까지 좋은 디자인은 아주 훌륭한 디자이너만 할 수 있다.

-잉바르 캄프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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