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많은 그래픽 티셔츠, 그리고 그 반항적인 문화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입는 스트릿 패션의 시작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유명한 슈프림, 안티 소셜 소셜클럽, 프라그먼트, 현 겐조의 디자이너, 베이프, 네이버후드 모두 스투시의 아들이자 손자뻘 되는 브랜드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지금 전 세계 패션계의 큰 획을 긋고 있는 많은 브랜드들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모두 '스투시 트라이브'라는 하나의 크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투시 트라이브는, 그리고 스투시는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그 스토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숀 스투시는 1954년, 해변가에 인쇄소를 운영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바다와 서핑 문화 그리고 프린팅에 대한 인식과 재능을 타고난 소년이었습니다.
숀이 청소년기에 들어갈 무렵, 1970년대는 젊은이들이 바다로 모여들어 서핑을 즐기던 서핑의 시대였습니다.
('피치스 peaches'편에서 말씀드리는 서브컬처에 대해 읽고 오시면 더욱 좋습니다.)
그러한 영향을 온몸으로 받으며 자라온 숀 스투시는 13살에 서핑보드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15살에 보드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서핑 쉐이퍼라는 직업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여름에는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고, 겨울이 되면 스키장에서 스키강사를 하며 친구들을 만들었고 그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향후 스투시의 운명의 시작과 끝에 함께 있게 되는 인물인 '프랭크 시나트라'라는 친구를 만들게 되죠.
그러던 어느 날 숀 스투시는 자신의 서핑보드 브랜드가 가지고 싶어 집니다.
그렇게 삼촌이 스투시라는 이름을 그래피티식으로 제작해준 로고를 서핑보드에 새겨 넣게 되며 스투시의 역사는 시작이 됩니다.
숀 스투시는 그렇게 제작된 서핑보드와 서핑보드를 구매하면 굿즈 개념으로 증정하던 스투시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함께 자신의 자동차 트렁크에 넣어서 돌아다니며 판매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또 운명의 인물인 향후 일본과 지금은 전 세계 스트릿 패션계를 주름잡는 대부 '후지와라 히로시'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숀 스투시는 서핑보드 박람회에 찾아가 자신의 보드를 판매하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서핑보드보다는 기념품인 티셔츠 1000장이 미친 듯이 팔려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그와 친구관계를 유지하며 똑똑한 머리 덕에 회계사가 되어있던 프랭크 시나트라는 스투시에게 사업을 권유하며 1984년 함께 스투시를 창립하게 됩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매장을 가지고 싶었는데 뉴욕에 유니온 매장을 운영하던 제임스 제비아에게 다가가 우리도 뉴욕에 매장을 가지고 싶다며 요청을 하게 되었고, 스투시와 유니온의 합작인 매장을 뉴욕에 설립하고, SIT(Stussy International Tribe) 스투시 트라이브를 만들기 시작하고, 바시티 재킷을 제작하여 돌리기 시작합니다.(이 제품은 40주년 기념으로 또 한 번 발매되기도 했죠.)
'스투시 트라이브(stussy tribe)'라는 그룹은 패션계의 거물급 인사(가 되는)들과 함께 펼치는 그룹으로써, 그 이름은 숀의 이모에게 영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의 이모는 원시시대를 모티브로 조각을 하는 조각가였고, 당연하게도 이 또한 자연스럽게 그의 영감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전해집니다.
스투시 트라이브는 뉴욕의 제비아, 도쿄 출신의 히로시, 런던의 마이클 코펠먼, 유럽의 루카 베니니로 이루어진 국제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을 말 그대로 국제적으로 뻗어있었고, 실제로 무서운 성장세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스투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약 7년 만인 1991년에는 도쿄 점도 오픈하며 스투시 트라이브의 무서운 성장을 보였지만, 워낙에 굿즈 개념으로 시작된 티셔츠였으므로 그 퀄리티가 현저하게 낮아 이래저래 많은 욕을 먹고 시장바닥에 굴러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슈프림의 패러디로 더 유명한 루이비통의 모노그램의 무단사용을 먼저 실천했던 스투시는 당연하게도 고소를 받는 등 힘겨운 날을 지나가고 있기도 했으며,
패션에 대한 진심 어린 발전보다는 수익성만 생각하던 숀 스투시에게 질린 제임스 제비아는 스투시를 떠나 1994년 스투시를 운영하며 배운 것들을 토대로 자신만의 브랜드인 슈프림을 창설하였고, 스투시와 동일하게 모노그램을 무단 사용하기도 하였죠.
하지만 그럼에도 스투시의 판매력은 엄청났는데, 1996년 숀 스투시가 돌연 디자이너직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스투시가 잘 될 거라는 생각도 없었는데 너무 잘되었고 많은 돈을 벌었다. 돈을 많이 벌고 쓰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라며 떠났고, 훗날 에스 더블(S/Double)이라는 브랜드로 다시 패션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투시는 그와 함께하던 프랭크 시나트라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죠.
프랭크 시나트라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스투시의 움직임을 아주 확실하고 정확한 방향으로 빠르게 조향 하기 시작합니다.
제비아의 빈자리는 훗날 언디핏의 설립자인 '에디 크루즈'에게, 디자이너 자리에는 발렌티노와 베르사체 디자이너를 역임했던 '닉 보워'를 영입합니다.
또한, DTC정책을 펼치는데, DTC정책이란, Direct To Consumer의 약자로 직역하자면 직영매장을 뜻합니다.
전 세계에 마구잡이식으로 흩어져있던 스투시의 라이센스를 전부 회수하고 전부 직영매장으로 돌린 후 품질과 서비스에 대한 관리에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당시에는 워낙에 전 세계 매장이 많았기에 많은 말들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스투시를 지키는 가장 큰 행보였다고 평가받는 정책이지요.
그렇게 Stussy Chapter Store를 제작하게 되었고, 서핑 브랜드에서 스케이트 보드로 확장을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최고의 보더 7명을 영입하여 스투시 보드팀을 제작하였고, 월드투어를 시작합니다.
월드투어를 다니면서 당시에 보드 브랜드를 지향하던 다양한 브랜드들 중 나이키 sb라인과 일정이 겹치게 되었고, 그 둘의 대결을 성사시키며 훗날 나투시라고 불리는 나이키 스투시 콜라보의 시작이 만들어지죠.
월드투어를 끝낸 스투시는 전 세계적으로 보드 브랜드라는 인식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반항과 자유의 상징이 됩니다.
2012년에는 스투시 트라이브 2기를 만들어 다양한 뮤지션들과 협력관계가 되었고,
프랭크의 아들인 데이빗 시나트라가 스투시의 총괄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데이빗 시나트라는 아시아 시장으로의 확대와 기존의 스투시의 자세를 찾아오는 전략과 브랜드의 다양성을 꾀하는 전략을 메인으로 삼았는데, 대학시절 아시아 시장의 가능성을 알아본 데이빗은 원래 일본만으로 한정되어있던 스투시의 발이 아시아 전역으로 확장하게 되었고,
기존 스투시의 작품들을 복각하여 그의 정신을 다시 되새기게 됩니다.
이 시점에 나투시가 세계적으로 대박을 터트리게 되며 디올과 콜라보를 하는 등
단연코 스트릿 시장의 1등 공신으로 세상에 발도장을 찍게 되며 지금은 스트릿의 클래식이 되어버린 스투시입니다.
이 스투시가 스트릿 패션의 클래식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의 첫 번째는 기존의 광고 방식인 셀럽에게 협찬하여 입히는 방식이 아닌, 자신들의 문화와 어울리는, 진정으로 문화를 즐기는 멋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지급하였고, 그 사람의 멋과 내가 가진 멋의 공통분모를 형성하기 위한 움직임이었기 때문입니다. (슈프림도 같은 방식으로 보더들에게 티셔츠와 후드티를 지급했죠.)
두 번째로 가장 큰 점은. 숀 스투시의 안목이었는지 인복이었는지 그의 우수한 능력과 교육이었는지, 그와 함께 일했던 모든 사람들입니다.
맨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스트릿 패션계를 주름잡는 많은 브랜드들과 디자이너들, 그리고 패션계의 영향력을 끼치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스투시에서 일했었고, 나와서 전 세계적으로 뻗어져 굵직굵직한 브랜드들을 탄생시켰다는 점입니다.
모두 스투시에서 일했으므로 그와 비슷한 방식이거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방식으로 전개했기에 그 결이 같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는 그의 마케팅 방식입니다. 슈프림도 진행했던 반항아적인 명품 브랜드의 패턴과 그래픽의 무단 사용.
이 점이 스트릿 브랜드에서 그들을 가장 쿨하게 만들었고, 그런 인식이 대중들에게 퍼지며 자유롭고 반항아적인 이미지를 풍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그들의 SS로고는 샤넬과 동일하게 S를 서로 등지게 해서 샤넬의 고풍스러움을 스트릿에 가져와 적용하는 등 과감하고 파격적인 행보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스트릿계의 행복의 첫 스타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네 번째로 당연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점인 그들의 잘 제작된 제품이었습니다.
엥? 아까 품질은 완전 별로라고 하지 않았나? 싶지만 말하고자 하는 점은 옷의 퀄리티를 떠나, 그들이 정성 들여 제작하는 프린팅과 안목 그리고 그 프린팅이 품은 의미 등 스트릿 시장을 저격하기에 완벽한 안목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위의 모든 것들이 지켜진다 해도 좋은 아이템 제작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들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테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삼일천하로 끝날 수 있는 브랜드였겠지요.
지금도 클래식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이러한 헤리티지를 지키는 제품들을 각 시대의 문화와 상황에 맞게 재치 있게,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것을 확실하게 지켜나가는 모습이 있기에 스트릿의 클래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월드투어 디자인도 계속해서 나오는 이유는 그들이 스케이트보드 브랜드가 된 그 시점과 헤리티지를 기념하고 강조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뿐이 아닌, 앞쪽에 패션으로 유명한 굵직굵직한 도시 이름과 정갈하고 깔끔한 폰트가 있지만 뒤쪽에는 그들의 아이덴티티가 담긴 도시의 이름과 휘갈겨 쓴 폰트. 이러한 점들이 감성을 자극하고 더 극적으로 보이게 만들었으며 끊임없이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같은 프린팅으로 다르게 해석하여 내어놓으니 제품이 출시되면 항상 완판이 되는 일들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로고 플레이를 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다양한 상징을 제시하여 하나가 되는 수많은 로고들 8 볼 로고(8 볼은 당구의 승패를 결정짓는 마지막 볼이기도 하며 은어로 약물의 1/8oz를 뜻하기도 합니다.) 로우라이더 폭주족들의 상징은 주사위 로고, 심지어는 동일한 싸인도 입맛에 맞게 선택이 가능한 스톡 로고와 숀 폰트 로고로 나뉘기도 합니다.
이러한 다양성과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세심함 그리고 처음부터 CD(Creative Director) 한 명이 멱살 잡고 이끌어 나가는 브랜드가 아닌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하여 당 시대의 다양한 점들을 흡수하고 반영하며 시대에 맞게 대응해 왔기 때문에 이 브랜드는 지금까지 리뉴얼 한번 없이 계속된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들이 추구하는 브랜드의 방향성과 맞게 고객센터나 홈페이지 직원이 정말 싸x지가 없다고 유명한 브랜드 이기도 합니다.
과연 어느 정도로 싸가x가 없을지 홈페이지에 문의글을 남겨보면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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